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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o serious?
우리가 심각했던 건 조커 때문이었다. 조커는 배트맨을 보며 “당신이 나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라고 연인에게 속삭이는 듯한 연사(戀辭)를 보내지만, 사실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만든 것은 조커였다. 내키는대로 아무나 죽이고, 어떠한 규칙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의 잘난 양심과 알량한 자존심을 끝간 데 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타락시켜버리고 마는 조커의 존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동안 혼란과 무질서,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보내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를 찬양했고, 때로는 나치에게 휘둘렸으며, 파시즘의 광기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그냥 놓아뒀다. 늘어나는 국지전이라거나, 공격 당한 세계의 심장 등은 모두 조롱과 냉소를 키우는 자양분이 됐고, 끝도 없이 증식하는 유동성이라는 괴물은 흘러넘치고 넘쳐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나눔의 감동을 빼앗고, 탐욕의 욕망만을 밀어넣었다. 조커는 어쩌면 이 모든 것, 또는 그 이상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의 얼굴 위에 새겨진 흉터는 아버지가 칼로 새긴 것일 수도 있고, 아내 앞에서 면도날을 씹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모든 것’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출생기록도 없고, 입고 있는 옷에 상표조차 붙어있지 않은 데다 이름도, 나이도 모두 미상이다. 조커는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나 권력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진지하지?”라고 묻는 조커의 질문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혼란이지만, 조금 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반대에 반대한다’는 식의 무정부주의다. 누구도 조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에게는 이상이 있다. 이 영화는 조커의 이상과 배트맨의 이상의 대결이고, 이해할 수 있는 신념과 이해가 가지 않는 신념 사이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미국인이 끊임없이 마주쳐 왔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대결이며, 우리도 익숙하게 마주쳐 왔던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과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 사이의 대결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의미 없는 구별에 대한 반성적 성찰 가운데 이처럼 박력있고 흥미진진하면서 진지했던 영화가 또 뭐가 있었는지, 난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영화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압도적이고, 내 인생에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다. 나는 고뇌하는 배트맨이 최첨단 자동차에 올라 완벽 갑옷을 입고 고담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 정도에 열광하겠다는 마음으로 극장에 갔다. 극장에 들어가보니 그 모든 기대는 120% 온전히 채워졌다. 우선 히스 레저의 조커. 그는 잭 니콜슨의 조커를 우습게 만든다. 거의 20년 전이었던 그 때만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게 매력적이고 위협적이며, 연민까지 불러 일으키는 조커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위대한 배우를 가볍게 뛰어넘은 이 배우는 요절해버리기까지 한 터라 더욱 깊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그렇다고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이 조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끈하고 잘 생긴 모델같은 남자가 마이클 키튼 못지 않은 수준으로 고뇌하는 배트맨을 연기하다니. 일종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옛 영광 따위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된 것 같다. 헐리우드도, 관객들도, 모두 진화하고 있으니까.
p.s. 조커가 속삭이는 “You complete me.” 어디서 들어봤다 했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르네 젤위거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 그리고 매년 스스로 정하는 올해 최고의 영화. 2008년에는 아마도 이 영화가 아닐까. 오늘내일 중으로 보기로 했던 ‘월E’가 좀 걸리긴 하지만.
두 편의 개봉 전 영화, 하나의 느낌
“네 얼굴에 웃음을 새겨넣어주지.” 조커가 외친다. 그는 아직 살이 찌지도 않았고, 깔끔하게 메이크업을 다듬지도 못했으며, 고급 정장 따위를 걸친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대신 그는 에너지가 넘치고, 드러내놓고 폭발시키는 분노가 있으며, 예측불가능한 청년의 격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배트맨 ‘다크나이트’의 예고편. 우리는 이미 웃는 소리를 녹음해 틀어가며 웃음을 연기해야만 했던 슬픈 악당의 죽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길고 긴 과거의 회고담 속으로 거꾸로 걸어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과거로 옮겨 간 우리의 눈 앞에 ‘살아 숨쉬는 젊은 조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의 젊음은 곧 사그러들어야 하고, 그의 에너지는 곧 퇴화돼야 함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이 비극인 이유는 조커의 역할을 맡았던 현실 세계의 배우마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이미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이 영화는 한 훌륭한 젊은 배우의 유작 노릇까지 맡아야 했다.
이것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나는 이 영화의 디테일은 커녕 줄거리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예고편이 아니다. 세련된 검은 망토를 두르고, 유선형의 잘 빠진 배트카를 탄 채 흑백의 고담시티를 질주하던 팀 버튼의 배트맨이 일종의 ‘도시적 고뇌’를 상징했다면, 배트맨비긴즈에 등장했던 아직 뭔가 모자라고, 투박하며, 젊고 불안한 상태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마치 ‘성장의 고뇌’를 겪는 것처럼 보였다. 다크나이트는 아마도 배트맨 비긴즈의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과연, 거칠고, 힘만 앞서며,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배트맨만 어리고 불안한 시절을 보냈을까. 조커는 어땠을까. 불행과 상실을 함께 겪어가는 같은 시대의 젊은이들은 과연 어떤 계기로 서로 다른 인생을 선택하게 되는 걸까. 예고편의 길이는 2분 남짓. 그저 불태우고 폭발하고 소리치는 장면들의 연속에 불과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다크나이트를 보기도 전에 미리 감정과잉에 휩싸이고 기대로 두근거리게 만든 것이 이 짧은 예고편이었다면, 마이블루베리나이츠를 보기도 전에 비슷한 느낌을 갖도록 만든 것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사 기사였다. “이 영화에는 분명 왕가위의 인장이 넘쳐난다. 허름한 카페와 도시의 고독한 기차소리, 인물들의 메마른 내레이션, 그리고 창밖에서 안을, 안에서 밖을 마치 멈춘 시간 안에서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가 그렇다”라는 식의…
왕가위는 누구보다 평론가들로부터 사랑받은 감독 가운데 한명이지만, 그가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평론가들로부터 사랑받은 이유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였다. 비디오가게에서 열혈남아를 끄집어낸 것은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팬들이었고, 코아아트홀에서 중경삼림을 장기상영하도록 만들어낸 것도 영화담당 기자들이 아니라 팬들이었다. 앞서 인용한 기사의 뒤로 이어지는 “왕가위를 흠모한 나머지, 그의 껍데기라도 기꺼이 뒤집어쓰고자 하는 어느 신인감독의 데뷔작을 보는 기분”이라는 혹평이 설혹 사실일지라도, 내게 왕가위의 새 영화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당신이 미국인이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데, 하루키가 처음으로 영어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돼 출간을 기다리는 느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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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크나이트만 기다리면 되는군요.
프레스티지

지난 금요일날 봤으니까 아마 지금쯤 영화를 본지 대략 72시간째.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난 뒤 떠올랐던 갖가지 잡생각들은 지워지고, 한 가지 장면만이 줄기차게 떠오른다.
그건 두 주인공이 한마디씩 내뱉는 고통의 내공 싸움. 쌍둥이가 한 사람처럼 살아가기 위해 멀쩡한 손가락을 잘라야 했고, 한 여자를 두 사람이 사랑해야 했던 그 고통. 그리고 끝없이 두 사람으로 분열하는 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매번 기계장치에 설 때마다 죽음의 고통과 갈채의 환희 사이에서 번민하던 그 고통.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그 상황이 단순한 트릭같았고, 두뇌 싸움에서 싱겁게도 미리 결말을 짐작해버린 나는 영화가 막상 끝나자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이 꽤 괜찮았는지, 몹시 쌀쌀해진 서울 거리를 터벅터벅 걷다보니 갑자기 가슴에 오한이 밀려온다. 두 경우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텐데. 어떻게 그런 상황을 만들었을까. 쓸데없이 늘어지며 이미 결말을 알아버린 관객들을 대상으로 대사를 쏟아넣은 막판 연출은, 막이 내린지 72시간 뒤에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기 위한 감독의 술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스칼렛 요한슨은 점점 스스로를 마릴린 먼로의 그늘에 가두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훨씬 달라질 수 있을텐데. 진주귀고리 소녀의 그리트가 왜 마릴린 먼로의 재판이 돼야 하는 것일까. 마이클 케인은, 어쩔 수없이 숀 코넬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같은 영화에 함께 출연하곤 했던 두 사람은, 꽤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게 나이를 먹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멋지다.
또 하나. 크로아티아 출신의 니콜라 테슬라. 사실, 데이빗 보위의 액센트가 꽤 멋들어졌던 것 이상으로, 배역 자체가 멋졌다. 전기를 사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