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ettist

the long and winding road

Archive for the ‘크리스쳔베일’ tag

터미네이터, 해방군의 시작

without comments

길게 지속되는 시리즈에 대한 남발되는 오마주와, 끼워맞추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스토리라인, 차라리 인형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했던 CG로 제작한 ‘깜짝 등장 아놀드 주지사’… 탓하려고 들자면 탓할 게 한두 장면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터미네이터였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나중에 시리즈를 어떻게 봉합하려고 여기까지 몰아붙이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막 간’ 상태다.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는 1, 2편도 딱히 훌륭할 것은 없는 게, 미래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왔던 카일 리스가 생년월일 기준으로 자신보다 수십살 연상인 사라 코너와 사랑에 빠져서 존 코너를 낳는다는 설정부터가 일종의 ‘원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래에서 보낸 T-800 때문에 심판의 날이 생기다니… 그걸 꿰어 맞추려다보니 존 코너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T-800을 해킹해서 다시 과거로 돌려보내고, 그 다음에는 케이트 브루스터가 존 코너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T-800을 해킹해서 과거로 보낸다. 이럴 바에는 T-X를 터미네이터 1편의 시대로 보내버리면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텐데도 똑똑한 스카이넷은 결코 그런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유는 하나겠지. 시리즈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10년씩 건너뛰며 25년을 이어져 내려 온 이 시리즈는 결국 2018년의 미래에까지 이른다. 존 코너는 케이트 브루스터와 2003년에 이미 로맨틱한 관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15년 동안이나 자식 없이 지내다 이제야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스토리를 따지는 게 이렇게 부질없는 시리즈가 또 있겠냐만서도(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 시리즈에는 백투더퓨처만큼의 리얼리티도 없다.) 결국 또 부질없는 짓을 하기 위해 3편을 다시 꺼내어 봤다. 의미심장했던 건, 존 코너의 죽음이 3편에서 예고되고,(T-800에게 살해된다. 그것도 3편에서 존 코너와 케이트 브루스터를 구하기 위해 파견됐던 바로 그 로봇.) ‘단파 라디오’가 앞으로 레지스탕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암시가 나온다는 것 정도다. 게다가 극장 개봉 당시에는 몰랐는데, 3편의 디자인과 스카이넷에 대한 설정은 4편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4편의 묵시록적인 세계는 3편의 프로토타입이 진화한 것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해온 바와 같이, 이 시리즈의 4편은 꽤 괜찮은 영화다. 1편이 약간 호러와 같은 느낌을 줬다면, 2편은 정말 잘 짜여진 블록버스터였고, 3편은 액션(특히나 초반의 자동차 추격신)에서만큼은 최고였다. 4편은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어야 했다. 하지만 저예산 시절의 공포물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했고, 2편 만큼이나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기에는 3편이 벌여놓은 뒷수습을 하기에도 급급했다. 3편의 액션이 리얼했던 건 조너던 모스토우의 역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경이 현대였기 때문이었는데 2018년이 배경인 4편에서는 자동차가 건물을 때려부수는 식의 액션은 애당초 불가능하게 마련이다. 시리즈의 전작들을 닮기 보다는 오히려 ‘트랜스포머’에 가까울 4편에 ‘리얼한 액션’을 가미하는 방법을, 감독인 맥지는, ‘전쟁’에서 찾았다.

총탄이 날아다니고 구식의 A-10 썬더볼트와 최첨단 헌터로봇이 맞붙는 식의 설정은 현대의 무기를 갖고 최첨단 미래형 로봇과 싸우느라 악전고투를 벌여왔던 기존 시리즈의 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다. 이제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다른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여전히 자기 희생, 기계의 인간성, 압도적인 차이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 등의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변주되며 이어지지만, ‘인간보다 인간다운 기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느라 흘러왔던 2, 3편보다는 훨씬 더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의 편에 서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5편도 당연히 만들어야 할텐데, 그때는 누가 이 부담을 짊어지고자 할까. 이 시리즈는 어디까지 이어질 생각인 걸까.

Written by 가슴시린

6월 1st, 2009 at 6:04 오후

Posted in the darkroom

Tagged with ,

Why so serious?

with 3 comments

우리가 심각했던 건 조커 때문이었다. 조커는 배트맨을 보며 “당신이 나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라고 연인에게 속삭이는 듯한 연사(戀辭)를 보내지만, 사실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만든 것은 조커였다. 내키는대로 아무나 죽이고, 어떠한 규칙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의 잘난 양심과 알량한 자존심을 끝간 데 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타락시켜버리고 마는 조커의 존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동안 혼란과 무질서,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보내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를 찬양했고, 때로는 나치에게 휘둘렸으며, 파시즘의 광기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그냥 놓아뒀다. 늘어나는 국지전이라거나, 공격 당한 세계의 심장 등은 모두 조롱과 냉소를 키우는 자양분이 됐고, 끝도 없이 증식하는 유동성이라는 괴물은 흘러넘치고 넘쳐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나눔의 감동을 빼앗고, 탐욕의 욕망만을 밀어넣었다. 조커는 어쩌면 이 모든 것, 또는 그 이상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의 얼굴 위에 새겨진 흉터는 아버지가 칼로 새긴 것일 수도 있고, 아내 앞에서 면도날을 씹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모든 것’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출생기록도 없고, 입고 있는 옷에 상표조차 붙어있지 않은 데다 이름도, 나이도 모두 미상이다. 조커는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나 권력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진지하지?”라고 묻는 조커의 질문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혼란이지만, 조금 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반대에 반대한다’는 식의 무정부주의다. 누구도 조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에게는 이상이 있다. 이 영화는 조커의 이상과 배트맨의 이상의 대결이고, 이해할 수 있는 신념과 이해가 가지 않는 신념 사이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미국인이 끊임없이 마주쳐 왔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대결이며, 우리도 익숙하게 마주쳐 왔던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과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 사이의 대결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의미 없는 구별에 대한 반성적 성찰 가운데 이처럼 박력있고 흥미진진하면서 진지했던 영화가 또 뭐가 있었는지, 난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영화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압도적이고, 내 인생에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다. 나는 고뇌하는 배트맨이 최첨단 자동차에 올라 완벽 갑옷을 입고 고담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 정도에 열광하겠다는 마음으로 극장에 갔다. 극장에 들어가보니 그 모든 기대는 120% 온전히 채워졌다. 우선 히스 레저의 조커. 그는 잭 니콜슨의 조커를 우습게 만든다. 거의 20년 전이었던 그 때만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게 매력적이고 위협적이며, 연민까지 불러 일으키는 조커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위대한 배우를 가볍게 뛰어넘은 이 배우는 요절해버리기까지 한 터라 더욱 깊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그렇다고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이 조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끈하고 잘 생긴 모델같은 남자가 마이클 키튼 못지 않은 수준으로 고뇌하는 배트맨을 연기하다니. 일종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옛 영광 따위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된 것 같다. 헐리우드도, 관객들도, 모두 진화하고 있으니까.

p.s. 조커가 속삭이는 “You complete me.” 어디서 들어봤다 했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르네 젤위거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 그리고 매년 스스로 정하는 올해 최고의 영화. 2008년에는 아마도 이 영화가 아닐까. 오늘내일 중으로 보기로 했던 ‘월E’가 좀 걸리긴 하지만.

Written by 가슴시린

8월 11th, 2008 at 2:22 오전

나는 그곳에 없다.

without comments

당신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라고 아무리 주장하든, 나는 그곳에 없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당신이 서 있으라고 하는 곳이 아닌 바람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가는 곳일 뿐.

당신은 나를 가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가수가 아니고, 당신은 나를 혁명가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혁명을 해본 적이 없다. 당신은 나를 속물 연기자로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연기보다는 삶을 살았고, 당신은 나를 부자로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애초에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당신은 당신을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나 또는 당신 가운데 누구 하나가 더 우월할 수도 또는 열등할 수도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이다.

젊었던 시절의 나와, 나이를 먹은 나와, 늙어갈 나는 모두 나이지만, 이 수많은 나는 ‘몸’이라는 작은 하나의 공간을 공유함과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나를 규정지으려 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삶조차 규정짓지 못하면서.

 

Written by 가슴시린

6월 15th, 2008 at 6:46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