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ettist

the long and winding road

Archive for the ‘조니뎁’ tag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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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다. 이럴 수가. CG에 처음 놀라고, 비주얼만으로도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라다.

Written by 가슴시린

12월 17th, 2009 at 1: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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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할 타자의 역전 홈런 가능성, 스위니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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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이 개봉된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팀 버튼 타령인 사람들이 많다. 배트맨, 가위손, 배트맨2로 이어지는 3연타석 적시타의 화려한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에드우드도, 화성침공도, 슬리피할로우도, 범타에 불과했다. 심지어 혹성탈출과 빅피쉬, 유령신부, 찰리와 초콜릿공장은 병살타에 가까웠다. 한 때, 모두가 사랑하던 ‘한 방’을 갖춘 타자였던 팀 버튼은 그렇게 과거의 영웅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실력은 점점 퇴보하는 것 같았고, 고집만 늘어갔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난 팀 버튼을 ‘우리 시대의 가장 과대평가된 감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우물만 평생 파는 사람은 결국에는 일가를 이루게 마련이다. 다시 또 실베스터 스탤론의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난 팀 버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피가 난무하고, 눈을 돌리기 싫은 곳에 일부러 카메라를 클로즈업으로 가져가는 악취미는 영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스위니 토드는 대단했다. 이전까지의 팀 버튼 영화는 악취미가 그저 악취미에 불과했다. 영화와 그 기괴한 악취미는 늘 따로 놀았다. 마치 주류 사회를 향해 “나는 당신들과 다르니, 상품성이 있소”라고 악이라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런 차별화가 먹혀들었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왜 ‘유령신부’였는지, 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었는지. 그런 결론에 그런 연출의 부조화가 과연 부조화로서 적절하기나 했던 것인지. 웃을 수밖에 없던 조커와, 컴플렉스의 화신일 수밖에 없던 펭귄멘에게 가슴 깊이 동조되고, 가위손 에드워드에게 연민을 느끼던 그 순간들이 영적이고 진실했던 것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이후의 작품들은, 미안하지만, 얄팍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안타 행진이 반복됐다. 스위니 토드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별 것 아니겠지.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다시 그가 타석에 나올 때 두근거리기 시작할 것만 같이. 변화는 타격 자세였다. 그동안 남들이 아무리 비난해도 절대로 바꾸지 않던 자세가, 이번 타석에선 약간 변했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던 그의 드라마가, 다시 시대를 읽어내기 시작했고, 애당초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던 등장인물들에게 억지로 캐릭터를 부여하는 대신, 모든 인물에게서 ‘인간다운 감정’이라고 흔히 분류되는 식의 행동을 들어내 버렸다. 이것은, 여기저기서 요구하는 잡다한 요구들에 불안하게 비틀거리며 타협하거나, 아니면 타협하지 않겠다며 엉뚱한 장소에서 판을 벌이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이 규칙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큰 변화다. 영화는 그 덕분에 몹시도 건조하고, 보는 내내 입 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괴롭고 보기 힘든 장면들이 이어져도 쉽게 눈을 돌릴 수 없는 것은, 이런 변화가 그 상황에 내몰린 표정 없는 인간들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배트맨을 봤을 때와 같은 그런 식의 전폭적인 믿음은 가지 않지만, 아마도 다음에는 팀 버튼이 타석에 다시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면, 아마도 제대로 해석된 루이스 캐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Written by 가슴시린

6월 15th, 2008 at 6: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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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캡틴 잭 스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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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잭 스패로우 선장과 만났던 것은 2003년 여름 캐나다 밴쿠버의 한 극장에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실력은 매한가지라 이 거친 바다건달들의 멋진 말투가 외국인에게는 쥐약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큰 줄거리 파악 외에는 소소한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때도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근처에 다가서면 럼주로 중독된 쉰 듯한 땀냄새와, 생선비린내보다 더할 게 뻔한 입냄새가 가득해 보이는 거렁뱅이 해적에 불과했지만, 잭 스패로우에게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매력이 있었다. ‘자유’였다.

대부분의 미국 영화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자”는 구호가 등장하면 슬슬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곤 한다. 자유란 참 좋은 말인데, 미국인들이 그 단어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며) 자행한 범죄들을 생각하면 단어 자체마저 의미가 변색되는 느낌이다. ‘세상의 끝에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 스완이 멋지게 해적 함대를 이끌며 자유고 뭐고 외치고 있을 땐 뻔한 미국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싸움이 끝나고, 한번도 ‘자유를 위하여’ 따위의 구호를 내뱉지 않았던 잭 스패로우가 또 다시 돛단배 하나와 나침반에 의지해 모험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진짜 자유가 느껴진다. 도덕도, 종교도, 국가도, 심지어 가족이나 동료마저도 필요없이 홀로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분명히 이야기 전개에 따르는 비중으로 보자면, 잭 스패로우 못지않은 주연인데도 불구하고, 늘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던 엘리자베스 스완과 윌리엄 터너도 3편에서만큼은 매력적인 인물로 결말을 맺는다. 남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긴 다리로 해적들을 걷어차다가도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훌쩍거리던 엘리자베스 스완은 해적 함대를 이끄는 선장이 된다. 전설의 탄생인데,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그 전에 주윤발이 그녀를 ‘칼립소’라며 잘못 추켜세웠던 것이 심리적으로 관객을 무장해제시켜놓은 모양이다. 게다가 그녀는 마지막에 10년에 하루밖에 만날 수 없는 남편을 담담히 떠나보내는 쿨한 매력도 보여준다. 그녀는 천상 타고날 때부터 해적이었던 모양이다.

윌리엄 터너는 더 복합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1편에서는 그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인데 해적 아버지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2편에서 그는 큰 변화를 맞는다. 사랑했던 여인이 매력만점의 해적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것 같으니 질투에 불이 붙은 거다. 그런 복선 덕분에 3편 내내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윌리엄의 비굴한 행적이 의외로 가슴시리게 이해가 간다. 또 주인공 가운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윌리엄은 가장 불행한 결말을 맞는 햄릿과도 같은 존재다. 아마 내가 올란도 블룸이라면 3편의 시나리오를 받아들고는 자신의 비극적인 역할에 기뻐서 춤이라도 췄을 것 같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더 제작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3부작으로 진행된 스토리의 완결편으로 보자면 이번 편은 정말이지 흠잡을 데가 없다. 마지막 소용돌이 액션의 박진감은 1, 2편의 모든 액션을 능가하고, 모든 의문이 풀리는 치밀한 시나리오는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게다가 디즈니 영화답게 충분히 비현실적이고 유쾌하면서도, 디즈니 영화답지않게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윌리엄 터너가 비극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에 지금 내 머릿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듯, 가능하면 이 시리즈도 여기까지만으로 끝내서 일종의 전설이 됐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훌륭한 3부작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애당초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 따위가 원작이었다는 한계마저 극복한 채.

굿바이, 캡틴 잭 스패로우. 당신의 해적 액센트가 그리울거야.

Written by 가슴시린

6월 15th, 2008 at 3:56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