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올란도블룸’ tag
굿바이, 캡틴 잭 스패로우

처음 잭 스패로우 선장과 만났던 것은 2003년 여름 캐나다 밴쿠버의 한 극장에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어실력은 매한가지라 이 거친 바다건달들의 멋진 말투가 외국인에게는 쥐약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큰 줄거리 파악 외에는 소소한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때도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아무리 봐도 근처에 다가서면 럼주로 중독된 쉰 듯한 땀냄새와, 생선비린내보다 더할 게 뻔한 입냄새가 가득해 보이는 거렁뱅이 해적에 불과했지만, 잭 스패로우에게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매력이 있었다. ‘자유’였다.
대부분의 미국 영화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자”는 구호가 등장하면 슬슬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곤 한다. 자유란 참 좋은 말인데, 미국인들이 그 단어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며) 자행한 범죄들을 생각하면 단어 자체마저 의미가 변색되는 느낌이다. ‘세상의 끝에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 스완이 멋지게 해적 함대를 이끌며 자유고 뭐고 외치고 있을 땐 뻔한 미국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싸움이 끝나고, 한번도 ‘자유를 위하여’ 따위의 구호를 내뱉지 않았던 잭 스패로우가 또 다시 돛단배 하나와 나침반에 의지해 모험을 떠나는 장면에서는 진짜 자유가 느껴진다. 도덕도, 종교도, 국가도, 심지어 가족이나 동료마저도 필요없이 홀로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분명히 이야기 전개에 따르는 비중으로 보자면, 잭 스패로우 못지않은 주연인데도 불구하고, 늘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던 엘리자베스 스완과 윌리엄 터너도 3편에서만큼은 매력적인 인물로 결말을 맺는다. 남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긴 다리로 해적들을 걷어차다가도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훌쩍거리던 엘리자베스 스완은 해적 함대를 이끄는 선장이 된다. 전설의 탄생인데,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그 전에 주윤발이 그녀를 ‘칼립소’라며 잘못 추켜세웠던 것이 심리적으로 관객을 무장해제시켜놓은 모양이다. 게다가 그녀는 마지막에 10년에 하루밖에 만날 수 없는 남편을 담담히 떠나보내는 쿨한 매력도 보여준다. 그녀는 천상 타고날 때부터 해적이었던 모양이다.
윌리엄 터너는 더 복합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1편에서는 그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인데 해적 아버지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2편에서 그는 큰 변화를 맞는다. 사랑했던 여인이 매력만점의 해적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것 같으니 질투에 불이 붙은 거다. 그런 복선 덕분에 3편 내내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윌리엄의 비굴한 행적이 의외로 가슴시리게 이해가 간다. 또 주인공 가운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윌리엄은 가장 불행한 결말을 맞는 햄릿과도 같은 존재다. 아마 내가 올란도 블룸이라면 3편의 시나리오를 받아들고는 자신의 비극적인 역할에 기뻐서 춤이라도 췄을 것 같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가 더 제작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3부작으로 진행된 스토리의 완결편으로 보자면 이번 편은 정말이지 흠잡을 데가 없다. 마지막 소용돌이 액션의 박진감은 1, 2편의 모든 액션을 능가하고, 모든 의문이 풀리는 치밀한 시나리오는 공들인 티가 역력하다. 게다가 디즈니 영화답게 충분히 비현실적이고 유쾌하면서도, 디즈니 영화답지않게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윌리엄 터너가 비극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에 지금 내 머릿속에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듯, 가능하면 이 시리즈도 여기까지만으로 끝내서 일종의 전설이 됐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훌륭한 3부작을 볼 수 있다니. 그것도 애당초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 따위가 원작이었다는 한계마저 극복한 채.
굿바이, 캡틴 잭 스패로우. 당신의 해적 액센트가 그리울거야.
킹덤오브헤븐

꽤나 고민을 한 각본이겠지만, 다 보고 나면 꽤나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 좀 허탈하다. 공성전의 처절함을 저 정도로 잘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긴 한데, ‘스펙터클’ 만으로는 아무래도 만족하기 힘들다.
천한 출신, 스스로의 발견, 도움을 주는 존재, 시련과 함께 찾아오는 기회, 성장, 영웅성의 발현, 영웅의 귀환. 좀 뻔하다. 영화는 그냥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신화적 구조를 따라 진행된다. 갈등의 축도 단순하다. 영화 개봉이 이라크전이 시작되기 직전이라 살라딘과 예루살렘의 기독교 왕 사이의 평화공존이라거나, 평화공존을 깨는 기독교 광신도들이라는 설정이 의미깊기는 하지만, 그러려니 하는 정도다. 왠지 뻔하다.
인상적인 건 살라딘이라는 인물. 배우가 그 인물의 훌륭함을 다 살릴 정도로 훌륭한 양반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역할 자체는 충분히 멋졌다. 남이 잘 살던 땅에 갑자기 쳐들어와 ‘우리 성지니 내놓으라’고 하는 녀석들과 평화공존을 할 줄 알고, 나병으로 죽어가는 기독교 왕을 위해 자신의 왕실 주치의를 보낼 정도로 아량이 넓으며, 신하가 적장 중 가장 용맹한 녀석을 생포한 뒤 은혜를 갚겠다고 목숨을 살려줘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 앞에서 사분오열된 기독교 십자군은 정말 ‘불한당’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다만, 영화에선, 그렇게 위대한 품위를 가진 사람처럼 생기지 못한 배우가 살라딘을 맡았고, 중동 액센트로 영어를 쓰면서 작전회의를 하는 통에, 극본에서는 멋졌을 장면들의 품격이 확 떨어져 버린 듯.
p.s. 검을 뽑을 때 ‘츠르릉’ 하는 쇳소리가 나는 건 거짓이라고 한다. 쇠와 쇠가 맞닿는 것 같은 이런 소리는 검의 이를 나가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 대부분의 검집은 가죽과 나무 등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슥 뽑히는 검보다는 멋진 소리와 함께 광채를 내뿜는 검이 더 멋지지 않을까.
엘리자베스 타운

그녀는 천사였을 겁니다.
하늘에서 처음 만났고 땅에서 종교처럼 힘을 북돋아주는 여자라는 건 굉장히 비현실적인 설정입니다. 엘리자베스타운의 여주인공 클레어는 그래서 일상적인 드라마 속의 멋진 여주인공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사랑하고 갈등을 겪고 위기를 맞고 위기를 해소하는 식의 진행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드루와 클레어의 러브스토리는 목적지가 정해진 여정처럼 순차적으로 진행됩니다. 실패한 자식을 깨우쳐주는 건 강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그림자입니다. 아버지를 둘러싼 다양한 등장인물은 인생을 긍정하는 방식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엉엉 우는 대신 살짝 웃음을 보입니다. 그 살짝 웃음에 등장인물은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답하고, 관객은 엉엉 울게 됩니다. 그런 영화였습니다.
“If it wasn’t this, it’d be something else.”
영화는, 켄터키 작은 마을의 더위처럼, 뜨거운 태양으로 가득한 아스팔트 도로의 아지랑이처럼, 빨간 모자의 홍수 속에서 단 하나의 빨간 모자를 찾아내는 드루의 눈빛처럼, 따스하면서 강렬합니다. 맨 처음 잠시 등장하는 ‘필’ 역의 알렉 볼드윈을 제외하면 사랑스러운 인물만 100%에 가까운 드문 영화였죠. 카메론 크로우의 영화니만큼 풍성한 팝의 홍수에 휩쓸리게 되는 건 일종의 보너스라고 할 만 하고요.
평단의 평가는 (언제나 그렇듯) 별로 좋지 않지만, 제게 올해의 영화를 뽑으라고 혹시 누가 물어본다면, 올해의 영화는 엘리자베스 타운에서 찍혔다고 저는 주저함없이 말할 겁니다.
——
그러니까, 부연 설명을 하자면, 이 영화는 제 2005년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