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ettist

the long and winding road

Archive for the ‘매기질렌할’ tag

소설보다 이상한…

without comments

stranger영화 속 주인공 해롤드 크릭은 양치질의 ‘스트로크’ 횟수를 세고, 늘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타며,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시계바늘같은 삶을 살아간다. 영화 자체의 진행조차 주인공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다. 일상의 사이클에 얽매인 주인공이 어느날 운명같은 사랑에 빠지고, 여주인공 덕분에 자신의 시계바늘 같은 삶을 되돌아본 뒤 규칙을 벗어나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는 얘기다. 결국 계기는 사랑이며, 솔루션도 사랑이다. 이쯤 되면 무협소설의 전형적 구조를 차용해 현대극을 써내려가는 인터넷 판타지 소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특별한 장치가 하나 있다. 바로 주인공 해롤드 크릭이 새로 쓰여지고 있는 소설 ‘죽음과 세금’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그 특별한 장치다.

해롤드 크릭의 운명은 운명같은 사랑 때문에 변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소설가 캐런 에이펠이 마무리하고 있는 소설의 전개에 따라 결정된다. 운명의 사랑마저도 에이펠이 정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등장한다. 에이펠은 늘 자신의 소설 말미에 주인공에게 죽음을 안겨주기로 유명한 작가였던 것이다. 해롤드의 머릿속에는 에이펠이 타자를 치는 내용이 나레이션으로 들려오는데, 어느 날 에이펠은 해롤드의 ‘임박한 죽음’을 예고한다. 해롤드는 패닉에 빠지게 되고, 죽지 않기 위해 작가를 찾아 나선다.

사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비약이 일어난다. 해롤드와 캐런의 만남은 우연히 보게 된 TV 덕분에 계기가 마련되고, 해롤드의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줄스 교수가 ‘Little did he know…’라는 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매우 독창적이지도 않은 어구 하나를 듣게 되면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소설과 현실의 만남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사용할 뿐이니 관객이 알아서 이해해 달라는 양해를 요구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에 다가서면 표현하기 어려운 작은 감동이 스멀스멀 가슴에 번져온다. 그건 아마도 디테일의 힘이다. 서른 여섯개의 이를 일흔 두 번 닦는 해롤드 크릭의 결벽부터, 문서보관실의 서류철을 넘기며 들려오는 소리를 먼 바다의 파도 소리로 상상하는 샐러리맨의 낭만까지, 영화는 우리가 늘 겪는 일상의 수많은 일들에 시시콜콜한 의미를 부여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손목시계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라거나,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창백한 소설가의 삶까지, 영화 극본이 원작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매우 문학적이다. 게다가 작가를 찾아 나서는 소설 속 캐릭터라는 건 현대문학에서 수없이 변주되며 반복돼 온 고전적인 장치여서 마치 21세기에 포드 T모델을 타고 거리로 나선 운전자를 보는 것 같은 고색창연한 매력마저 느끼게 한다. 수의를 상징하는 듯한 파란 정장을 입은 채 마지막 출근길에 오르는 해롤드의 모습은 죽음을 알면서 십자가를 메는 예수의 행적마저 떠올리게 하고, 그의 예정된 죽음이 다시 삶으로 뒤바뀌는 순간은 예수가 자기 희생을 통해 구원받는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성서의 해석 수준과는 다른 것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신’의 역할에 있는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스스로 창조한 캐릭터의 힘과 매력에 밀려 결국 모든 소설을 다시 쓰기로 결정하고, 작가에게 권위를 부여해 줬던 또 다른 ‘신’의 역할을 해 온 문학교수 또한 캐릭터의 힘을 뛰어넘지 못한다.

잘 쓴 각본은 오래도록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잭 헬름은 이 영화의 각본으로 전미작가협회가 수여하는 최우수 오리지널 각본상을 받았다.

Written by 가슴시린

12월 24th, 2008 at 10:49 오후

Why so serious?

with 3 comments

우리가 심각했던 건 조커 때문이었다. 조커는 배트맨을 보며 “당신이 나를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라고 연인에게 속삭이는 듯한 연사(戀辭)를 보내지만, 사실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만든 것은 조커였다. 내키는대로 아무나 죽이고, 어떠한 규칙에도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의 잘난 양심과 알량한 자존심을 끝간 데 없이 무의미한 것으로 타락시켜버리고 마는 조커의 존재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동안 혼란과 무질서,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보내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를 찬양했고, 때로는 나치에게 휘둘렸으며, 파시즘의 광기가 세계를 지배하도록 그냥 놓아뒀다. 늘어나는 국지전이라거나, 공격 당한 세계의 심장 등은 모두 조롱과 냉소를 키우는 자양분이 됐고, 끝도 없이 증식하는 유동성이라는 괴물은 흘러넘치고 넘쳐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나눔의 감동을 빼앗고, 탐욕의 욕망만을 밀어넣었다. 조커는 어쩌면 이 모든 것, 또는 그 이상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의 얼굴 위에 새겨진 흉터는 아버지가 칼로 새긴 것일 수도 있고, 아내 앞에서 면도날을 씹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모든 것’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출생기록도 없고, 입고 있는 옷에 상표조차 붙어있지 않은 데다 이름도, 나이도 모두 미상이다. 조커는 돈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명예나 권력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진지하지?”라고 묻는 조커의 질문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혼란이지만, 조금 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반대에 반대한다’는 식의 무정부주의다. 누구도 조커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에게는 이상이 있다. 이 영화는 조커의 이상과 배트맨의 이상의 대결이고, 이해할 수 있는 신념과 이해가 가지 않는 신념 사이의 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미국인이 끊임없이 마주쳐 왔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사이의 대결이며, 우리도 익숙하게 마주쳐 왔던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과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 사이의 대결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의미 없는 구별에 대한 반성적 성찰 가운데 이처럼 박력있고 흥미진진하면서 진지했던 영화가 또 뭐가 있었는지, 난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영화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압도적이고, 내 인생에 이런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다. 나는 고뇌하는 배트맨이 최첨단 자동차에 올라 완벽 갑옷을 입고 고담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모습 정도에 열광하겠다는 마음으로 극장에 갔다. 극장에 들어가보니 그 모든 기대는 120% 온전히 채워졌다. 우선 히스 레저의 조커. 그는 잭 니콜슨의 조커를 우습게 만든다. 거의 20년 전이었던 그 때만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게 매력적이고 위협적이며, 연민까지 불러 일으키는 조커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위대한 배우를 가볍게 뛰어넘은 이 배우는 요절해버리기까지 한 터라 더욱 깊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그렇다고 크리스천 베일의 배트맨이 조커에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끈하고 잘 생긴 모델같은 남자가 마이클 키튼 못지 않은 수준으로 고뇌하는 배트맨을 연기하다니. 일종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옛 영광 따위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된 것 같다. 헐리우드도, 관객들도, 모두 진화하고 있으니까.

p.s. 조커가 속삭이는 “You complete me.” 어디서 들어봤다 했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르네 젤위거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 그리고 매년 스스로 정하는 올해 최고의 영화. 2008년에는 아마도 이 영화가 아닐까. 오늘내일 중으로 보기로 했던 ‘월E’가 좀 걸리긴 하지만.

Written by 가슴시린

8월 11th, 2008 at 2:22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