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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즈에게 바치는 영화들

전에는 미국에 간다면 시애틀에 꼭 가보고 싶었다. 이유는 꽤 단순했다. 시애틀이 커트 코베인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커트 코베인은 죽었는데도, 그저 가보고 싶었다. 파리에 가면 꼭 페르라셰즈의 짐 모리슨 무덤 앞에 가보고 싶었던 것처럼.
요새는 미국에 간다면 꼭 뉴올리언스에 가보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시애틀에 가봤기 때문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벤자민 버튼과 같은 영화들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이런 표현을 들으면 어떻게 느낄지야 알 수 없으나, 이런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뉴올리언즈야말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아닐까 싶어진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날의 벅차는 기쁨을 광장과 거리에서 나누던 아름다운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난 벤자민 버튼은 추하기 그지 없었다. 날 때부터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이었으니까. 이 날 태어난 벤자민 버튼의 운명을 예고했던 건 전장에서 희생된 자신의 아들이 되살아나기를 염원하며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낸 시계공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영화의 끝은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를 덮치던 재앙 직전의 뉴올리언즈였다. 시계공이 만든 거꾸로 가는 시계도 바로 그 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마치 ‘과거를 되돌리고 싶다는 당신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하지만 ‘이제는 거꾸로 가는 시계 대신 앞을 보며 살아갈 때’라고 얘기하는 듯. 2009년 개봉된 이 영화를 찍는 사람들의 마음이 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파괴되기 전의 뉴올리언즈를 그려낸 다른 영화 ‘러브송’(바비 롱을 위한 사랑노래)도 기억이 난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이 도시에 매혹되게 만들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이 도시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아쉬워지게 만들었던 영화. 다행스럽게도 이 영화는 2004년에 촬영됐다.
카트리나의 충격이 한창이었던 때 봤던 이 영화가, 보지도 못한 도시를 아쉬워하게 만들었고, 마치 탈레반이 석불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던 때마냥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줬던 영화가 있다. 토니 스콧의 ‘데자뷰’였다.

나름 스릴러, SF, 액션이었는데도, 난 그저 뉴올리언즈만 보였다. 마디그라 축제의 열기, 카트리나 이후 미국 전역에서 답지한 성금과 자원봉사자의 행렬로 순식간에 절반 이상 복구됐다는 뉴올리언즈의 ‘복원된 과거’ 등이 매력적이었던 건 기본이다. 더 가슴에 와 닿았던 건 ‘데자뷰’라는 소재였다. 이미 봤던 일인 듯한 그 느낌, 하지만 뭔가 현실은 아닌 듯한 그 기시감. 2007년의 뉴올리언즈를 설명하는 데 데자뷰보다 더 적당한 어휘가 있었을까. 게다가 이 영화는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 뉴올리언즈에서 촬영된 첫 영화였다.
미국에 간다면, 꼭 뉴올리언즈에 가보고 싶다.
조디악

성실한 직업인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사람이 부족해.” “업무가 너무 많아.” 그리고 그들이 늘 느끼는 감정이 있다. 외로움. 불확실함.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결론은 언제나 두 가지다. 성공 또는 실패. 세상은 냉혹하다.
조디악의 그들도 그랬다.
어느 날, 형사 데이빗 토스키와 윌리엄 암스트롱의 눈 앞에 살인범이 나타난다. 이 살인범은 살인을 게임처럼 벌이는 연쇄 살인마인데다 신문사로 자신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공권력을 비웃기까지 한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이런 독특하고 유명한 살인범을 검거하기 위해 책정한 인원은 단 두 명. 토스키와 암스트롱 뿐이다. ‘조디악 킬러’라고 이름 붙여진 이 살인범은 늘 경찰보다 반 발짝 쯤 앞서 있다. 경찰은 그를 잡지 못한다. 토스키와 암스트롱은 두렵다. 인원도 늘지 않고, 조디악 사건 이외에도 수많은 강력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서내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암스트롱은 결국 강력반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고, 토스키는 사건을 스스로 꾸며냈다는 루머에까지 연루된다. 수사가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토스키는 두렵다. 그리고 외롭다. 조디악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짜증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기자 폴 에이브리에게 조디악은 기회다. 눈 앞에 샌프란시스코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그는 그 사건의 담당 기자다. 더욱이 사건을 수사하는 데이빗 토스키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정보를 주고 받은 적이 있는 좋은 파트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몇 차례, 그는 조디악과 관련된 특종을 터뜨린다. 이건 성공 같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사건을 추적하며, 깊이 연루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살해 협박을 받는다. 조디악의 다음 목표로 지목된 것이다. 독자와 동료 기자들은 가슴에 “내가 폴 에이브리입니다”라고 쓴 뱃지까지 달면서 그를 지켜주려고 하지만, 중압감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마감을 끝내고 불이 붙어버린 머리를 식혀 보려고 한 두잔 마시기 시작했던 술은,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가 되기 시작한다. 조디악의 협박이 계속되고, 경찰 수사가 점점 더 미궁에 빠질수록 에이브리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국, 알콜이 그를 갉아먹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자랑하던 최고의 사건기자는 급기야 이름 없는 지방지의 3류 기자로 전락하고 만다. 실패였다. 빛나던 직업적 성공은 결국 몇 년 지속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는 우연히 조디악 사건을 만난다. 그는 삽화가일 뿐이다. 조디악 살인사건과 그의 직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심지어 편집국장조차 편집회의에 들어선 그를 보고는 마감이나 하라며 회의실에서 쫓아낸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그를 자극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형사도, 기자도 결국 절망하고 포기한 뒤에야 비로소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변두리에 서 있던 그에게는 이때까지 기회란 없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일을 포기한다. 삽화는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 그는 누구도 끝내려들지 않았던 이야기를 끝내야 했으니까. 그는 계속해서 한 발씩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결국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는 그에게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는 성공한 것일까? 조디악의 협박이 이어지면서, 공포에 둘러싸인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극도로 겁이 났다. 그런 인생이었다.
조디악 사건의 주인공은 늘 조디악 킬러였다. 세상은 이 고약하고 괴상망측한 엽기적 연쇄살인범만을 기억해 왔다. 하지만 영화는 망가져가는 성실한 직업인들을 되살려낸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정체가 중요하지도 않았던 살인마는, 영화 속에서 이 평범한 사람들의 어둡고도 치열하지만 몹시도 평범한 일상을 비추는 조명으로 격하된다. 평범했던 그들의 직업적 삶은 실패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그 실패를 향해 걸어갔던 과정은 아름다웠다. 마치 밥그릇을 예술로 빚어내는 도자기 장인의 손길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