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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g and winding road

Archive for the ‘the bookshelf’ Category

성공은 행운, 하지만 노력해야만 주어지는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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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요약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책이지만, (그리고 디테일이 훨씬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게 요약해보자면 이렇게 요약될 것 같다.

“성공은 기회의 산물이다. 성공할 기회를 갖게 된 운 좋은 이들만이 큰 성공을 한다. 하지만 운만으로 되진 않는다. 성공하려면 정말 많이 노력해야 한다. 1만 시간 이상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다는 건 어불성설, 1만 시간 이상 노력하면 재능이 부족해도 성공할 수 있다. 천재란 남보다 더욱, 훨씬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여기까지가 1부다. 이 강력한 메시지의 1부 덕에 아웃라이어는 ‘자기계발서’ 범주에 속해 있지만,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사회학/인류학 교양서처럼 느껴지는 2부 또한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인데,

“대한항공의 조종사들은 위계질서가 강해서 부기장이 기장에게 위기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대형 참사를 낳았다. 조종석에서 필요한 건 권위가 아닌 직접적 대화다. 하지만 쌀농사 문화에서 기반한 아시아 문화 특유의 섬세함은 아시아인의 수학실력을 낳았다. 미국이라고 안 될 건 없다.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도 휴식 대신 노력을 택해 방학을 성실하게 보낸다면 놀라운 성취를 이룬다.”

요약을 해서 보면 뻔한 얘기다. 1, 2부 모두 그렇다. 하지만 설명하는 방식 덕분에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경영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홉스테드 모형’이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이 홉스테드 모형이 대한항공 사고를 설명하는 열쇠다. 학자들이 설명하는 홉스테드의 Power Distance Index와 글래드웰의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훨씬 더 쉽게 이해되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또 우리가 우리의 조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지도 설명이 된다.

여러 가지가 기억에 남지만, 논쟁적인 마지막 챕터와 에필로그가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챕터는 ‘키프’라는 뉴욕 공립학교에 대한 얘기다.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는 미국식 교육의 일반적인 잣대와는 반대로, 키프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숙제를 내주고 방학 때에도 공부를 시킨다. 3개월씩 노는 미국 학교의 일반적 시스템과는 전혀 다르다.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지만, 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명문대에 진학한 뒤 궁극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비율은 일반 공립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사립학교와 키프가 갖는 가장 큰 공통점은 방학 때에도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놀리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아이들은 편안하게 뛰어노는 시간이 좀 줄어들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훨씬 나은 미래를 만든다. 그리고 그 아이가 속한 가정의 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에필로그는 글래드웰 가문의 이야기다. 그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우연과 기회와 환경과 노력이 조합됐는지에 대한. 성공은 쉽게 오지도 않지만, 이룰 수 없는 것도 아니다.

Written by 가슴시린

5월 8th, 2009 at 10: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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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시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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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by 김한민

일러스트 by 김한민

“그러나 네크워크란 놈은 피도 눈물도 없지요. 작은 링크 하나가 검사님의 자신감을 단숨에 쪽 빨아 삼킬 겁니다.”

신문이나 블로그 연재 소설은 감질나서 잘 읽지 않는 편인데,(‘개밥바라기별’도 꾹 참았다가 연재 끝난 뒤 단행본으로 나온 다음에야 읽었는데,) 저자들의 이름에 혹해 실수로 손을 잘못 댄 바람에 결국 멈추지 못하고 연재를 습관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화된 미래에 대한 묘사(남희석 사이보그라거나…)가 간간이 거슬리긴 해도, 가끔씩 통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때가 있는데, 오늘 연재가 특히 그렇다.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가 모델이 아닐까 싶은 노원장의 대사는 뭐랄까, 내가 저 시대에 저 나이로 살아남으면 저런 대사를 뇌까리지 않을까 싶은 페이소스가 있다.

건너 뛴 편이 워낙 군데군데 많다보니 언젠가 날 잡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지만, 최근 들어 빨라진 속도와 긴장감이 반갑다. 이런 미래의 이야기를 신문 연재와 같은 한 세기 전부터 존재했던 방식으로 해나가는 저자들의 의도는 뭘까.

Written by 가슴시린

4월 8th, 2009 at 3: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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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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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20세기를 살아간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영감의 창고’였다. 푸코와 데리다, 움베르토 에코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 역시 보르헤스와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남남일 수 없다. 20세기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보르헤스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구스 반 산트가 히치콕의 ‘사이코’를 리메이크하면서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완전히 똑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시도라고 박수를 쳤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떠올렸다. 스즈키 코지의 베스트셀러 소설 ‘링’에 등장하는 병렬 컴퓨터들이 창조하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만남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와 다를 바 없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수없이 많은 영화와 소설, 드라마에 차용돼 온 모티브다. 그 곳에는 어떠한 진실도 ‘등장하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사색의 기반은 책이었다. 우리에겐 인터넷도 있고, 영화도 있고, 각종 미디어 채널들이 존재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늙었을 때까지 보르헤스에게는 책 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그에게 모든 것을 빚졌다. 보르헤스는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책(혹은 텍스트)과 독자와의 관계, 텍스트를 수용하는 문제, 모방과 상호 텍스트성 등의 ‘포스트 모던’한 주제들을 던져줬던 사람이고, ‘에이, 나도 이런 생각은 전에 해봤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앞서 실제로 컬럼버스의 달걀을 세웠던 사람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픽션들을 만지고 또 만진다. 닳고 닳도록. 그는 여전히 이야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선지자이고, 예언자다.

Written by 가슴시린

3월 31st, 2009 at 3:55 오후